내가만난대산

장사꾼의 기질 - 이상회
글쓴이 관리자

날짜 21.05.27     조회 2292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적정가

 입사한 지 채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시절이었다. 증권 분야에서 부동산쪽으로 옮겨와 처음 부딪치게 된 일은 광화문 교보빌딩의 부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1,000평 정도를 확보한 상황에서 2,000평 정도가 더 필요했는데, 누구나 알 만한 보험사이다 보니 주민들이 엄청나게 비싸게 팔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엔 재개발을 하게 되면 정부에서 ‘강제수용권’이라는 것을 주었다. 말 그대로 성장과 개발이라는 논리 하에 땅을 헐값에 살 수 있는 호기였다.

 하지만 창립자님은 그런 방법은 싫다고 하였다. ‘주민들도 불만 없고 기업도 손해보지 않는 가격’을 찾으로하고 하니 정말 어려운 숙제였다. 결국 우리가 제시한 적정가가 맘에 안 들었는지 나머지 땅들은 직접 하나하나 매입했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해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사서도 안 되고, 상황이 유리하다고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사서도 안 되고, 가장 적정한 가격에 사라!”

 그렇다. 그것이 창립자님의 거래의 기본 원칙이었다.

 

이것이 브랜드다

 부지 마련에만 7년. 그렇게 탄생한 교보빌딩은 창립자님은 물론 전 직원의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이사하기 전에 우리는 혜화동에 있는 건물의 일부를 임대하여 좋은 말로 ‘전세’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의 중심 광화문 1번지에 22층짜리 높은 빌딩이라니. 그 날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짐을 나르고 채 정리도 안 된 방에서 밤을 새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저 너무 좋아서 앉아 있다 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밤샘 멤버에는 창립자님도 물론 있었다. 홀로 화장실에서 광화문 거리를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공에 대한 뿌듯함일까?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다짐이었을까? 그 답은 곧 알게 되었다. 

 우리의 주소는 1-1-1, 대한민국 1번지, 종로 1가 1번지였다. 그야말로 상징적인 서울의 중심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교보빌딩이 우뚝 서면서 우리의 발전은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중심에 선 교보빌딩은 우리를 대내외에 알리는 22층짜리 거대한 광고판이었고, 종로통을 찾는 사람들에게 길을 찾아주고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는 이정표이자 명소였다. 이것이 바로 요즘 들어 기업들간에 치열한 경재 요소가 되고 있는 브랜드 이미지, 브랜드 파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치와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기업의 성장은 정치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기업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일이지만 어찌 보면 줄만 잘 타면 초고속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회사 옆 큰길에 ‘뷰익’이라는 고급차가 세워지더니 경호원까지 대동한 남자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라며 땅을 사러 왔다고 했다. 우리 회사 소유로 성북동에 땅이 있었는데, 외삼촌 이름을 빌려 그야말로 공짜로 뺏으려는 욕심이었다. 창립자님은 나를 불렀다.

 “이 사람이 땅을 사겠다고 하는데, 최대한 편리를 봐주되 적정 가격에 팔아라.”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난 또다시 곤혹스러웠다. 마주 앉아 얘기를 들어보니 그야말로 거저 집어삼키겠다는 심사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회장님은 공과 사가 엄격한 분이다. 그러니 이건 분명 회사의 땅, 즉 직원들의 땅이자 우리 고객의 땅이다. 헐값에 팔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친다면 그건 회장님이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늘 정치에 대해 관심은 갖되 가까이 하지 말아라. 정치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좋다’는 창립자님의 생각이었다. 

 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대로 가격을 못 쳐주면 절대 못 판다. 누가 와도 그렇다. 대통령이 와도 그렇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배짱이 나왔을까? 그건 창립자님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 일을 창립자님께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갑자기 생각났는지 옛 얘기를 하듯 물으시기에 난 그렇게 돌려보냈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별일 아니란 듯 “잘했네!” 딱 한마디만 하였다.

 

+A를 더해서 팔아라

 창립자님의 건축 컨셉트는 한마디로 ‘밋밋한 건 싫다’는 것이다.

통일성을 위해선 잘된 사옥을 똑같은 모양으로 여러 곳에 지을 수도 있지만, 교보빌딩은 전부 개성 있고 특이한 모습들이다. 특히 마지막 건축물이었던 강남의 교보타워는 설계만 열 몇 번의 수정을 거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완성된 디자인을 두고도 이견이 많았다. 건물을 둘로 나누고 그 가운데에 통로를 두어 연결하면 모양은 좋을지 모르나 내부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는 면적으로 통로로만 사용하니 낭비라는 생각들이 많았다. 이를 두고 창립자님도 고민을 하였던 것 같다. 예술성이냐? 실용성이냐?

 하지만 창립자님은 예술성을 선택하였고,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음은 금방 드러났다. 특이하게 지어놓으니 짓자마자 100% 임대가 되어 만실이 된 것이다. 지금은 건물의 이미지를 위해 부실한 업체들을 골라낼 정도다.

 그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건물에다 예술성이라는 +A를 더해서 파니 진짜 잘 팔리는구나.’

 그러나 이것이 어디 건물뿐이겠는가? 그것은 모든 상품을 팔 때 소비자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는 가장 큰 경쟁력인 것을….

 

미래를 보는 눈

 다시 광화문의 교보빌딩으로 돌아가보자. 그 건물은 외국인들이 한번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는 법이 없다. 그 이유는 다른 건물에 비해 천장의 높이가 10~15cm 더 높고 복도가 넓어 그들의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국제화 · 세계화를 외치는 지금도 그런 건물이 흔치 않으니 25년 전에 이미 그들을 배려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창립자님의 선견지명에 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으나, 그 중 아직도 신기에 가까운 계성원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부지 마련을 위해 용인 일대를 거의 누비다시피 해서 약 스무 군데를 추천해드렸는데, 그 중 관청산이라는 아주 수려한 산 안에 절이 있는 터가 있었다. 중역진들도 모두 좋다며 80점을 주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창립자님은 50점으로 혹평을 하였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골프장이 들어설 자리다”라고 말씀하였다. 당시만 해도 골프를 많이 칠 때가 아니므로 생각조차 못했는데, 창립자님은 그 이유로 반대하신 것이다.

 지금 용인에 가보면 거의가 골프장이고 특히 그 주변에 골프장이 들어선 걸 보면 창립자님이 족집게 점쟁이보다 더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창립자님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늘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반평생 넘는 세월을 창립자님과 함께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장사꾼 기질을 가져라’라는 것이다. 고상한 기업가 정신도 아니고, 요즘 들어 부각되고 있는 상인 정신도 아니고 장사꾼 기질이라니! 그 말은 뼛속 깊이, 세포 하나하나에 녹아 있어 아주 작은 일에도 저절로 드러나는, 즉 삶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이상회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전) 1965년 교보생명 입사, 교보리얼코 본부장, 고문

 

* 본 글은 대산 신용호 선생 영면 1년을 기리며 2004년에 발간한 '내가만난 대산-세상엔 거저와 비밀이 없다'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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