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만난대산

이 땅에 진 빚을 갚고 싶다. - 김성훈
글쓴이 운영자

날짜 19.04.29     조회 165


 

대산 선생께는 못다 이룬 꿈이 있다. 영정 앞에서 “누군가 이루어 줄테니 염려 말고 고이 잠드소서”라는 말을 안타깝게 달래야 했던 꿈. 나는 그 꿈을 꺼내보려 한다.

 

 

세 번째 만남

  

공식석상을 제외하고 대산 선생을 이른바 독대한 것은 단 세 번뿐이다. 모두 다 선생이 제의를 해서 만난 것인데, 그가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꿈을 털어놓은 것은 생전의 마지가 대면이었던 1998년세 번째 만남에서였다. 내가 농림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암 선고를 받으신 후였던 것 같다.

  

그는 그 날 이렇게 말했다.

 

“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은 여생에 마지막으로 이 땅에 진 빚을 갚고 떠나고 싶다.”

 

모범적인 기업가로서 한평생을 보내신 분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당신이 무슨 빚을 졌다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농민의 후손으로 여지껏 살아왔다. 그러기에 교보생명의 밑 바탕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를 키워주고 늘 마음의 힘이 되어준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애정이 있다. 문막에 있는 땅을 이용해 농촌과 농민에 대한 사랑을 대대손손 남길 공익사업을 하고 싶은데, 아이디어를 좀 얻고 싶다.”

  

나는 “취재는 알겠으나 그것이 어찌 선생이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감히 그 분의 뜻을 테스트해보았다. 선생은 “짐승도 죽을 땐 고향으로 간다. 가지 못하고 고향을 바라보고 죽는다는데, 내가 어찌 나를 키워준 고향이고 큰 힘이었떤 농촌과 농업을 잊겠느냐?”라고 하였다. 수구초심을 말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자꾸 세상ㅇ 변하여 농촌에 희망이 없어지는데, 생명 사랑과 인간사랑의 소중함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없겠느냐?”라고 물었다.

 

난 그 자리에서 캐나다의 밴쿠버 아일랜드에 있는 ‘부차드 가드’에 대해 말씀드렸다. 세계 최고의 정원이라 일컬어지는 그 곳은 시멘트 업자인 로버트 (핌) 부차드와 부인인 제리 로버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은 서부개척시대에 그 곳에 있는 석회를 파내어 많은 돈을 벌었다.

  

어느 날 제니 부인이 석회를 실은 배가 항구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그녀의 손에 강낭콩과 꽃시를 쥐여주었다. 부인은 그걸 정원에 심은 후 아름답게 핀 꽃을 바라보면서 ‘왜 이것들을 손에 쥐여줬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곧 자신들이 석회를 파내면서 아름다운 자연ㅇ르 파괴했다는 걸 깨달았다. 부인은 남편과 상의한 후 곧바로 그곳에 꽃을 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매년 200만 명의 관광갱이 찾아오고 세계 최고의 식물.화훼 학자들이 찾아와 연구하는 식물요람이 탄생하게 되었다.

  

대산 선생은 “그런 곳이 있느냐?”며 감탄하였고, 난 곧바로 ‘부차드 가든’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다 드렸다. 그걸 보신 후 선생은 “농림부 장관을 그만두고 나오면 이 일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난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에 일단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장관직을 마치고 건강상의 이유로 캐나다에서 1년간 요양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모습을 영정에서 뵙게 될 줄이야.

 

그렇게 대산 선생의 마지막 꿈은 아쉬움을 남긴 채 마음으로만, 뜻으로만 함께 했던 미완의 꿈으로 뭍혀졌다.

 

 

첫 만남

  

대산 선생과의 인연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나는 ‘UNFAO(국제식량농업기구)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담당 지역 중에 중국, 북한, 러시아 등은 당시만 해도 적대국가로서 한국인은 발을 디딜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난 외교관이었기에 그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그 와중에 길림성에서 대산 선생의 일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교보빌딩만 아는 정도였지 교보라는 기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에 중국에 남겨진 대산 일가를 찾아 한국에 소식을 전하고 결국 만나게 해드렸다.

  

그 후 나는 그 일을 그져 흐뭇하고 뿌듯했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께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 일 때문인가 싶어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중국의 변화 전망과 북한의 실태 등이 궁금하니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하였다. 당시 나는 국내 최초로 신문과 방송을 통해 중국을 공개하면서 중국통으로 통했다. 선생께선 그걸 보시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교보생명과는 업무 관계나 사업 관계가 있을 수 없어서 좀 의외였는데, 선생은 꼬치꼬치 알고 싶은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호학정신이 대단한분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고 나오는 길에 “제가 신씨 일가를 찾아준 사람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은 무척 놀라시며 “세상에 이런 인연이 어디 있느냐”며 반가워하였다.

 

 

두 번째 만남

  

두 번째 만남은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WTO 등으로 우리나라 농민들이 큰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때였다. 나는 ‘신운동권 교수’라 불리며 186개 시민연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대규모의 집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선생은 그런 나를 신문과 방송에서 보고 불렀다. 그리고 내게 두 가지를 말씀하였다. 하나는 “ 난 정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해 김 교수가 주장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른다. 하지만 농촌과 농민을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만은 느껴진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내가 재단을 만들어 100억원을 내놓을 테니 농촌의 교육과 문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두 가지 해석이 교차했다. ‘그래, 농촌ㅇ르 돕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분은 교육과 문화 쪽에 치중하실 생각이시구나’ 하는 것과 ‘데모도 중요하지만 좀 순화하란 뜻인가?’ 하는 약간의 거부감 이었다. 하지만 그 분의 눈빛에서 어느 것이든 나를 위한 우정 어린 충고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산농촌재단’의 이사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후 재단 활동을 하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말씀하였던 ‘봉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교수 월급보다 많은 고문료를 주던 다른 재단들과는 달리 내가 받은 돈은 1년에 네 번, 회의가 있을 때 마다 거마비 명목으로 받은 10-20만 원이 전부였다. 그리고 식사도 늘 교보생명 뒤편 골목에서 1만 원짜리 이하의 식당밥을 먹곤 했다.

 

진정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대가 없이 봉사하는 것. 이것이 대산 선생과 우리의 공통점이었고, 농촌을 사랑하는 자들의 끈끈한 동지애였다.

  

 

네 번 째 만남 

 

네 번째 만남은 내가 먼저 선생께 청할 생각이었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난개발을 막고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전. 관리하는 ‘내셔널 트러스트’ 대표를 맡으면서 가장 든든한 사람으로 떠오른 이가 대산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가슴 속에 묻어야 했던 만남이지만, 난 영정 앞에서 그 분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누군가 선생님의 큰 뜻을 반드시 이루어줄 겁니다. 선생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 후손의 의무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마지막 장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떠날 때는 머문 자리에 향기를 남기지 못할지언정 구린내를 남기지는 말아야 한다.”

 

 

대산 선생은 원 없이 돈을 벌었고, 또 원 없이 돈을 쓰신 분이다. 하지만 그 ‘원 없음’이 향기를 남기는 이유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에, 내가 아님 남을 위해, 그리고 보다 큰 뜻에 돈을 썼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진한 향기에 감사하며,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이 우리의 몫임을 알기에 지금 그의 뜻을 더욱 깊이 음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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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 서울대학교 농업경재학과 졸업, 미국East West Center University of Hawaii 

            농업경제학 석사, 농업지원 박사 

            전) 제50대 농림부 장관, 중앙대 교수, National Trust 운동본부 공동대표, 

            경제정의실천연합 통일협회 고문

 

 

* 본 글은 대산 신용호 선생 영면 1년을 기리며 2004년에 발간한 '내가만난 대산-세상엔 거저와 비밀이 없다'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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